티스토리 뷰
목차

1997년 외환위기를 겪은 세대라면 그 시절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의 얼굴을 아직 기억할 것이다. 대기업이 줄줄이 무너지고 수많은 가장이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었다. 이 위기를 단순히 정부나 특정 기업의 잘못으로만 돌리기에는 더 깊은 구조적 문제가 있었다는 분석이 많다. '동학개미의 멘토'로 불리며 장기 투자를 전파해온 존 리 전 메리츠자산운용 대표는 여러 인터뷰에서 외환위기 당시의 경험과 이후 자신의 투자 철학을 이야기해왔다. 이 글은 그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외환위기의 교훈과 장기 투자 철학을 정리하되, 그를 둘러싼 논란까지 함께 살펴보는 해설 글이다.
외환위기는 예고된 위기였다
외환위기가 터지기 전부터 그 조짐을 감지한 사람들이 있었다. 존 리 전 대표는 미국에서 회계사로 일하던 시절 뉴욕의 한 한국계 은행 감사를 맡았는데, 그때 한 선배 회계사로부터 대우그룹의 재무 상태가 심각하다는 경고를 들었다고 회고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 경고가 현실이 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실제로 대우그룹은 외환위기 이후인 1999년 사실상 해체됐다.
당시 한국 기업들의 가장 큰 문제는 지나친 빚이었다. 부채비율(Debt-to-Equity Ratio)이란 기업이 자기 돈 대비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한국은행 기업경영분석에 따르면 외환위기가 터진 1997년 말 국내 제조업의 평균 부채비율은 약 396%에 달했다. 자기 돈 1원당 빚이 4원 가까이 됐다는 뜻이다. 당시에는 매출 규모를 키우는 것이 곧 성공이라는 인식이 강했고, 이익이 실제로 남는지는 뒷전이었다. 공급이 넘치는데도 빚을 내 공장을 계속 짓다 보니, 외부 충격 하나에 도미노처럼 무너진 것은 어찌 보면 예정된 결과였다.
빚으로 키운 덩치는 호황에는 힘이 되지만, 위기에는 가장 먼저 무너지는 약점이 된다.
기업의 상태를 보여주는 재무제표(Financial Statement)란 자산과 부채, 수익 구조를 숫자로 정리한 문서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를 제대로 읽을 줄 아는 일반인이 드물었고, 기업 현장에서조차 회계가 형식적으로 다뤄지는 경우가 많았다. 위기를 내부에서 미리 감지하기 어려운 구조였던 셈이다(참고: 한국은행).
외환위기가 터졌을 때 그의 선택은 철수가 아니라 정반대였다고 한다. 당시 미국 운용사에서 한국 주식에 투자하는 '코리아펀드'를 운용하던 그는, 그의 설명에 따르면 펀드 이사회를 설득해 오히려 자금을 더 모았고, 투자 유치를 위해 뉴욕, 런던, 파리 등을 돌며 투자자 설명회를 열었다. 이렇게 여러 도시를 순회하며 투자자들을 직접 만나 설명하는 방식을 로드쇼(Road Show)라고 한다. 그는 "한국인은 빚을 반드시 갚는다"는 논리로 서구 투자자들을 설득했다고 말한다. 실제로 1998년에는 350만 명 가까운 국민이 금 모으기 운동에 참여해 약 227톤의 금을 모았고, 한국은 예상보다 빠르게 IMF 구제금융을 조기 상환했다.
- 1997년 말 국내 제조업 평균 부채비율은 약 396%로, 자기 돈 1원당 빚이 4원 가까이 됐다
- 대우그룹은 외환위기 이후인 1999년 사실상 해체됐다
- 1998년 금 모으기 운동에는 350만 명 가까이 참여해 약 227톤의 금이 모였다
장기 투자 철학과 메리츠자산운용의 변화
개인 투자자가 가장 흔하게 빠지는 함정은 잦은 매매다. 조금 오르면 팔고, 떨어지면 불안해서 또 팔고, 그러다 손실이 쌓인다. 존 리 전 대표가 2014년 메리츠자산운용 대표로 취임한 뒤 강조한 것이 바로 그 반대였다. 펀드매니저가 단기 매매를 반복하는 대신, 좋은 기업을 오래 보유하는 장기 투자 문화를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메리츠자산운용은 그가 합류할 당시 업계에서 존재감이 크지 않은 운용사였다. 그는 잃을 것이 없는 곳이라 오히려 과감하게 바꿀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수직적인 보고 체계를 줄이고, 자율 출퇴근제를 도입하고, 금융사가 몰려 있는 여의도를 벗어나 사옥을 서울 북촌으로 옮겼다. 단순한 이사가 아니라 익숙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기 위한 상징적인 결정이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장기 투자(Long-term Investment)란 단기적인 주가 등락에 흔들리지 않고, 기업의 본질적인 가치를 믿고 여러 해 이상 보유하는 투자 방식이다. 말은 쉽지만 실천은 어렵다. 주변에서 "그 주식 떨어지던데 팔아야 하지 않느냐"는 말이 나오기 시작하면 대부분 흔들리기 때문이다. 그는 전국을 돌며 투자자들을 직접 만나 이 철학을 알렸고, 2020년 코로나19 이후 개인 투자자들이 대거 주식 시장에 뛰어든 '동학개미운동' 시기에는 대중 강연과 방송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그가 메리츠자산운용에서 시도한 변화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수직적인 보고 체계를 줄이고 이메일 중심의 수평적인 소통 구조로 바꿨다.
- 여의도를 벗어나 북촌으로 사옥을 옮겨 관성적인 사고에서 벗어나려 했다.
- 펀드매니저의 단기 매매 대신 장기 보유 중심의 운용 원칙을 강조했다.
- 전국의 투자자를 직접 찾아가 장기 투자 철학을 설명하며 신뢰를 쌓으려 했다.
퇴진, 그리고 이후의 행보
그러나 그의 메리츠자산운용 시절은 논란 속에 끝났다. 2022년 5~6월 금융감독원은 메리츠자산운용에 대한 수시검사를 진행했다. 메리츠자산운용의 사모펀드 4개가 존 리 대표의 배우자가 지분(약 6.57%)을 가진 지인의 P2P 업체 상품에 투자한 것과 관련해, 차명 투자나 이해상충 문제가 있었는지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그는 금감원 조사에서 충분히 소명했고 법적인 문제는 없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결국 2022년 6월 말 임기를 6개월여 남기고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당시 자산운용업계에서는 경영진의 준법·윤리 의식을 더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기도 했다.
투자 철학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것을 지키는 사람의 신뢰가 무너지면 메시지의 힘도 함께 약해진다.
그는 이후 인터뷰에서 대표직에서 물러난 경험을 "원인을 알 수 없는 교통사고"에 비유하며, 분노와 절망을 겪었다고 털어놨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본인의 시각이며, 당시 금융당국의 검사와 업계의 비판이 있었다는 사실도 함께 고려해야 균형 잡힌 이해가 가능하다. 이후 그는 소설을 쓰고, 교도소와 경찰서 등 다양한 곳을 찾아 금융 강의를 이어가는 등 금융 교육 활동에 집중하고 있다.
그가 강조하는 핵심 개념은 경제적 독립과 복리다. 경제적 독립(Financial Independence)이란 일해서 버는 소득 없이도 생활할 수 있는 자산 구조를 갖추는 것이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원리가 복리(Compound Interest)로, 수익에 다시 수익이 붙으면서 자산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구조를 말한다. 흥미로운 점은 한국인의 금융 지식 자체가 낮지는 않다는 것이다. 한국은행과 금융감독원의 '2024 전국민 금융이해력 조사'에 따르면 한국 성인의 금융이해력은 65.7점으로 OECD 평균(62.7점)보다 높았다. 다만 미래를 대비하는 '금융 태도' 점수는 53.7점으로 OECD 평균(58.0점)보다 낮았다. 아는 것을 노후 대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라는 뜻이다(참고: 금융감독원).
그가 운영하는 '존리의 부자학교'도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그는 미국 증권사 찰스 슈왑이 기존 금융권에서 잘 뽑지 않던 인재들을 채용해 성장한 사례를 들며, 금융 지식이 부족한 평범한 사람들에게 노후 준비의 기회를 주고 싶다고 말한다. 금융 교육의 필요성 자체는 많은 전문가가 공감하는 부분이다.
- 2022년 5~6월 금감원이 메리츠자산운용 사모펀드의 P2P 업체 투자를 두고 수시검사를 진행했다
- 존 리 전 대표는 법적 문제가 없다고 해명했지만, 2022년 6월 말 임기를 6개월여 남기고 물러났다
- 이후 금융 강의와 '존리의 부자학교' 등 금융 교육 활동에 집중하고 있다
자주 묻는 질문
Q. 존 리 전 대표가 말하는 장기 투자는 구체적으로 몇 년을 기준으로 하나요?
A. 정확한 기간을 정해두기보다는 최소 10년 이상을 전제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단기 주가 등락에 반응하지 않고 기업의 본질적 가치를 믿고 보유하는 것이 핵심이며, 복리 효과가 의미 있게 나타나려면 적어도 5~10년은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주장이다.
Q. 존 리 전 대표가 메리츠자산운용에서 물러난 이유는 무엇인가요?
A. 2022년 금융감독원이 메리츠자산운용의 사모펀드가 존 리 대표 배우자가 지분을 가진 P2P 업체 상품에 투자한 것을 두고 차명 투자와 이해상충 여부를 검사했고, 그는 그해 6월 말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법적인 문제가 없다고 해명했다. 투자 철학과 별개로, 운용사 경영진의 이해상충 관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Q. 외환위기 당시 외국 투자자들을 설득한 논리는 무엇이었나요?
A. 존 리 전 대표에 따르면 핵심 논리는 "한국인은 빚을 반드시 갚는다"는 것이었다. 탄탄한 제조업 기반과 높은 교육 수준, 그리고 금 모으기 운동처럼 국민이 함께 위기를 극복하려는 모습이 설득의 근거가 됐다고 한다. 실제로 한국은 IMF 구제금융을 예정보다 빨리 갚으며 위기를 극복했다.
Q. 경제적 독립을 목표로 투자를 시작하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A. 처음부터 거창하게 시작하기보다 적은 금액이라도 주식이나 펀드에 꾸준히 적립하는 습관이 중요하다. 초기 투자의 출발점이 되는 돈을 종잣돈(Seed Money)이라고 하는데, 금액보다 습관이 먼저다. 연금저축펀드 같은 절세 계좌를 활용해 지수형 ETF를 매달 자동으로 사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일찍 시작할수록 복리 효과가 커진다.
Q. 유명 투자 멘토의 조언은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요?
A. 장기 투자, 분산 투자, 일찍 시작하기 같은 원칙은 많은 연구와 데이터로 뒷받침되는 내용이라 참고할 가치가 있다. 다만 특정 인물의 말을 그대로 따르기보다는, 그 원칙이 왜 맞는지 스스로 이해하고 자신의 상황에 맞게 적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멘토 개인의 평판이 흔들려도 흔들리지 않는 것은 결국 스스로 이해한 원칙이다.
결론
외환위기의 교훈을 잊으면 비슷한 실수는 언제든 반복될 수 있다. 부채비율을 무시하고 덩치만 키우던 기업들의 실패는, 오늘날 늘어나는 가계 부채 문제와도 닮아 있다. 존 리 전 대표의 이야기에서 가져갈 핵심은 특정 인물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장기 투자는 선택이 아니라 노후 준비의 기본"이라는 원칙이다. 투자가 두렵다면 적은 금액의 적립식 투자부터 시작해보는 방법이 있다. 완벽한 때를 기다리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가장 큰 손실이 될 수 있다.
이 글은 공개된 자료와 인터뷰 내용을 정리한 정보 제공 목적의 글이며, 특정 인물이나 상품에 대한 투자 권유가 아니다.